11월 30일 21시 56분
11월의 마지막 날 밤.
나는 언제나처럼 혼자 샬로텐부르크의 독일식 4층, 한국식 5층 집에 앉아 있다.
노트북의 전자시계는 12월 1일 오전 5시 59분을 가리킨다.
한국 시간이다.
한국 시간을 독일 시간으로 바꾸어 놓지 않은 것이다.
한국은 어느덧 12월.
매서운 추위가 찾아왔다고들 한다.
그래 맞아, 한국은 어느날 갑자기 날이 추워진다. 추위에 슬퍼질 만큼.
이제는 속절없이 한 해를 보내줘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 마냥.
오늘은 요가원에 가기 전까지 적당하게 유쾌한 하루였다.
일찍 일어나 수업을 들었고, 그 전에 썩 경쾌한 카페에서 아이스 카페라떼를 테이크 아웃 했고(나는 아이스 카페라떼를 테이크 아웃 하는 것을 좋아한다), 힘들어하는 지인을 급히 만나 함께 시간도 보냈다.
그는 독일 생활이 많이 힘들다고 한다.
아주 어릴 적부터 미국에서도 스페인에서도 한참 지냈던 사람인데.
견디지 못해 결국 엄마가 베를린으로 오시기로 했다고 한다.
중국 면요리, 마파두부에 한국 치킨을 먹었다.
이제는 이런 것이 입에 전혀 맞지가 않는다.
기름진 요리.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어온 느낌이다.
특히 튀김 음식이 힘들다.
치킨도 면도 두부도 많이 남겼다.
좋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사람과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조금의 과시도 피로함도 없는. 듣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그런 종류와 아주 동떨어진. 서로를 살피고 서로를 듣는 대화.
기대없이 즉석으로 들어간 카페는 모난 곳 하나 없이 좋기만 했다. 지도에 저장해둘 정도로.
집에 왔다. 두피를 들여다보니 새빨갛게 일어나 있고 껍질이 벗겨져 있다. 얼마나 깨끗하게 머리를 감았는데.
사실 이렇게 된지 좀 됐다. 아직까지도 이럴지 몰랐던 것이다.
요가원은 분명 기운이 좋았다.
어디 하나 지저분한 곳 없이 안락했고, 소름돋게 번쩍번쩍 하얗지도 않았으며
모든 것이 적당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원하는 수업은 아니었다.
베를린에서 요가를 지속할 날을 이제껏 많이 기다리고 기대해왔다.
요가원을 찾는 데에 정말 많은 시간을 썼고 베를린에 자리잡은 거의 모든 요가원을 다 살폈다.
너무 스포티하고 너무 힙하고 각종 아크릴, 플라스틱, 대리석으로 가득찬 한국 대형 카페 같은 곳은 싫었다. 좀 과도하게 솔직해지자면 문신으로 온몸이 새까맣게 덮힌 안내자도 싫었다. 나는 요가를 하고 요가를 가르치는 곳을 찾고 싶었다. 숙련자에게도 즐거운 수업을 하는.
오늘 간 곳은 좋은 곳이었지만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지도자는 정말 친절하게 대해주고 안내해주었지만 그랬다.
해가 깜깜히 지고 집에 돌아올 때 조금 슬퍼졌다.
나의 유일한 취미마저 실패하는 이 곳.
한국에 있는 더없이 좋은 공간과 다정하고 능력 있는 선생님들. 몇이나 떠올릴 수가 있는.
내가 생각하고 다짐한 것처럼 고개를 빳빳이 들고 활발하고 당당하지 않은 나도 싫어졌다. 싫은지는 한참이다.
위축되어 있고, 말을 삼키고, 말을 하지 않고, 무언가가 맘에 안 들고.
그런 내가 나도 지겹다. 그런 나와 함께 살아가는 게 쉽지 않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다시 한 번 요가원을 찾아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다시 베를린에 온다면,
독일에 온다면.
나는 어디에서 누구와 요가를 해야 하며
그때의 나는 또 얼마나 위축되어 있을 것이며
어디에 살아야 하는가
수정 언니가 마음을 담아 권해준 팟캐스트를 들었다. 아마도 마음이 헛헛해서.
내가 딱히 선호하지 않는 모습의 작품들.
<매니큐어 하는 남자>의 표지처럼 아주 2020년대스러운 일러스트,
이 세상이 인간의 사회적 분류를 상대로 단단히 잘못 구성되어 있다는 걸 일부분 혹은 꽤 많이 깨달은 이들의 딱히 학술적이지 않은 생활 이야기, 마음 이야기, 생각 이야기 같은 것.
내가 실은 딱히 즐기지 않는 것들이다. 더 이상 보고싶지 않은 마음 같은 것이 드는.
팟캐스터 두 명은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결혼은 싫고 혼자 살기도 싫었다는 설명이 있었다. 딱히 그 말을 덧붙일 필요성을 못 느끼겠는데. 여기저기서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해서 이 세상도 그걸 타격 없이 받아들여주는 건 아니니까 그렇다고 치자.
뚜렷이 기억에 남은 것, 혼자 10평 남짓의 집에 모든 걸 빽빽히 끼워넣어 사는 것보다 욕조가 있는 화장실의 30평 집에서 물리적 공간을 가지고 살고 싶었다는 식의 문장.
정확히 내가 가지고 있던 문장과 일치한다.
그런데, 그러면,
베를린에 와서 그렇게 내가 누군가와 살 수 있는가?
아니.
그럼 나는 누구와 그렇게 함께 살 수 있나? 누구와 그러기로 온 마음 담아 약속했던가?
혜윤이. 승렬이.
혜윤이와 나의 시기가 겹칠 수 있을까? 우리 둘 모두는 양육자가 서울에 번듯한 집을 가지고 있는데? 그 애와 나는 각자의 엄마가 너무도 애틋한데? (물론 나의 경우는 아빠가 러시아에서 돌아오는 순간 강제적으로 엄마와 애틋함 같은 것은 내팽겨쳐져버린다)
승렬이. 그 아이와 내가 결혼 없이 같이 살 수 있을까? 상황, 아니 정확히 말하자. 그 어른이 그것을 대단히 방해하고 우리의 끈끈한 관계가 약화하도록 하진 않을 것인가?
그럼 난 결혼 없이 아빠와의 화해 없이 내가 선택한 누군가와 같이 살 수는 있는 것인가?
서울에서는, 베를린에서는?
나는 앞으로도 수년간 혼자 잠들고 혼자 일어나고 혼자 식탁 아닌 공부책상에서 밥을 먹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수년간 혼자 집에 올 것이다. 온기로 나를 맞아주는 사람 없이.
쟤 오늘은 좀 안 나가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나와 함께해주는 사람 없이.
오늘은 3시간 동안 휴대폰 전파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30분 넘게를 끊어졌다 연결됐다를 반복하며 통화하는데 승렬이는 화 한 번을 내지 않고 다정했다.
결국 어느 시점에서부터 전파가 아예 끊겨버려 인사 한 마디 없이 통화가 끝났고 카카오톡도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도 2시간 동안 전송되지 않았지만 전파가 잡히고 보니 다정한 인사만이 남겨져 있다. 인사를 남긴 그 애는 곧 거지 같은 곳에다 휴대폰을 ‘내러’ 갔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을 이 애와 떨어져 관계의 흐트러짐 없이 살 수 있을 것인가?
이 애는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지?
이 애를 한국에 둔 내가 여기에 온전히 마음 붙이는 것 따위를 할 수는 있는 걸까?
이런 날도 있다.
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저런 날이 온다는 것 따위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오늘은 그냥 이런 날을 털어놓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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