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네 아빠 같은 사람

by 경 Kyung 2023. 12. 30.

언젠가 e의 엄마는 e의 애인을 두고는 e에게,
’너희 아빠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애‘ 라고 말했다고 한다.
엄마는 좋은 방향으로 말한 문장인데
스스로는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전해들으면 나로써는 내가 지금 가진 남자를 돌아보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 더 해봐야 그 전 남자도 잠깐 정도. 인간은 알고 보면 지극히 자기 자신에만 관심이 있으니까. 애인도 결국 자기 좋자고 만드는 인공적인 개념이니까. 친구도. 모든 관계는 그 구성의 근원 자체가 이기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하는 그 순간만큼은 이기적이지 않고 서로를 살피도록 노력하는 우리 둘.으로 인해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관계는 가치로 가득하다. 어쨌든 다시 테마로 돌아와서..


지금 사랑하는 남자를 떠올려보았다.
대조표의 x축에 그 남자와 내 아빠를 나란히 놓아봤다.
y축 항목을 써내려갔다.

나를 사랑하는 방식
화날 때 나를 대하는 말투 하는 말의 내용
내가 상처받아 있을 때 나를 대하는 방식
생김새
이 세상에 대한 태도
유년기
내가 잘못했을 때 나를 대하는 태도
아무일도 없는 평소에 나를 대하는 태도
나를 바라보는 눈빛
함께할 때 들게 하는 감정
평소 하는 말
취미
친구 관계
가족 관계
제 3자와 함께 있을 때 나를 대하는 태도


y축에 일치하는 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조금도 없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 하나 확인하다가 더 이상 새로운 항을 떠올려내지 않아도 될만큼 충분하게 검토했음에 안도했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내 아빠와 닮지 않았어. 이는 합리화도 세뇌도 아닌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


언젠가 n 언니는 웃는 얼굴로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는 게 예전부터 목표였’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이 제법 신기했다. 쓰기도 했고.
아빠 같은 사람만큼은 피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음을 깨닫는 게 많은 한국 헤테로 여자들의 역사 아니던가.
언니가 순수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세상 물정 모른다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다시,
n 언니는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는 게 목표였다 말했었다.
나는 부러웠다. 한 치의 망설임도 구김도 쓸쓸함도 묻어 있지 않은 티없이 해맑은 그 무언가가.



나는 이번 생에는
언니처럼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 삶을 선물받지는 못했지만.
이번 생에 나는 아빠 같은 사람은 피하고 싶은 삶을 받았지만
아빠 같은 사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을 받았다.


그것은 나를 안도하게도 했고
나아가 제법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주었다.